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시간 / 바벨의 도서관

2020. 5. 1. 07:45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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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박병규 옮김



     니체는 괴테와 실러를 한자리에서 논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을 뭉뚱그려 말하는 것 역시 무례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사고 속에서 공간은 배제할 수 있으나 시간은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오관을 가진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감각 기관만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감각이 청각이라고 한다면 시각의 세계는 사라진다. 즉, 창공, 별 등등이 사라져버린다. 촉각이 없다고 한다면 깔끄러운 것, 매끄러운 것, 주름진 것 등등이 사라진다.

 

  미각과 후각이 없다고 한다면 코와 구강 안에 위치한 감각 역시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청각만이 남는다. 이렇게 되면 공간이 배제된 세계가 가능해진다. 이는 개인들의 세계이다.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개인들의 세계, 수 백만, 아니 수 천만이나 되는 개인들의 세계이다. 그리고 그들은 말을 통하여 의사소통을 한다.

 

 

 

 

 

 

     우리는 언어만큼 복잡한, 아니 이보다 더욱 복잡한 언어를 상상할 수도 있는데, 이는 음악이라는 언어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의식과 음악으로만 이루어진 세계에서 살 수도 있다.

 

  음악은 악기를 필요로 한다는 주장은 반박이 가능하다. 음악 자체가 악기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악기는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저러한 악보를 생각해보면 피아노나 바이올린이나 플류트 등과 같은 악기가 없더라도 그 음악을 떠올릴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세계만큼이나 복잡한 세계, 음악과 우리들의 의식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가질 수 있다. 쇼펜하우어가 말했듯이, 음악은 세계에 부가된 무엇이 아니라 음악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세계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세계에서도 시간은 항상 존재한다.

 

  왜냐하면 시간이란 계기(繼起)이기 때문이다. 내 자신이나 우리들 각자가 어두운 방에 있다고 가정하면 시각의 세계는 사라지고, 각자의 육신도 사라진다. 우리가 육신을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예컨대, 나는 손으로 책상을 집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이 손과 책상에 대해 의식한다.

 

  하지만 무언가가 흘러간다. 무엇이 흘러갈까? 그것은 지각일 수도 있고, 감각일 수도 있으며, 혹은 그저 기억과 상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항상 무언가가 흘러간다. 여기서 테니슨의 아름다운 싯구가 생각난다. 그는 첫 연에서 이렇게 썼다.

“시간은 한밤중에 흐른다”


    이는 매우 시적인 생각이다. 모든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소리 없는 시간의 강물은 ―이러한 비유는 불가피하다― 땅속을, 들을 지나고 있고 공간을 지나고 있으며 별들 사이를 흐르고 있다.

     시간이란 본질적인 문제이다. 내 말은 우리가 시간을 배제할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의 의식은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끊임없이 변하는데 이러한 계기가 바로 시간이다.

 

  앙리 베르그손은 형이상학의 가장 큰 문제가 시간이라고 했다. 이 문제가 해결된다면 여타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내가 보기엔 다행스럽게도 그 문제가 해결될 위험은 없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언제나 이 문제 때문에 조바심할 것이다. 우리도 성 어거스틴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내가 그 질문을 받지 않았을 때는 나는 시간이 무언지 알고 있었다. 내가 그런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우리 인간은 20세기 내지 30세기 동안 시간의 문제를 숙고해왔으나 이 문제에 있어서 많은 진전을 보았는지는 의심스럽다. 우리는 항상 저 고대인이 느꼈던 당혹감을 느낀다. 내가 항시 인용하는 문구에서 헤라클레이토스가 느꼈던 당혹감 말이다. “어떤 사람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다시 들어갈 수 없다.” 왜 아무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다시 들어갈 수 없는가?

 

  첫째, 강물이 흐르기 때문이다. 둘째 ―여기서 우리는 이미 형이상학적인 것과 마주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신성한 공포의 근원처럼 느껴진다―, 우리 자신 역시 하나의 강물이며, 우리들 또한 흐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시간의 문제이다. 이는 덧없는 것을 다루는 문제이다. 즉, 시간은 지나간다. 다시 브왈로(Boileau)의 아름다운 시구를 보자.

“시간은 흐른다. 그리고 그 순간에 어떤 것은 우리로부터 이미 멀어져간다.”


     나의 현재 ―혹은 나의 현재였던 것― 는 이미 과거이다. 그러나 흘러가는 그 시간은 영원히 흘러가버린 시간은 아니다. 예컨대, 나는 지난주 금요일에 여러분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한 주일이 지나는 동안에 우리들 모두에게 많은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동일한 사람들이다. 나는 내가 여기서 논의를 하고 있었고, 여기서 이야기하고 사색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지난주에 나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아무튼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기억은 개인적인 것이다. 우리들의 상당 부분은 우리들의 기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상당 부분이 망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무튼, 우리는 시간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 그 문제를 풀 수는 없지만 이미 제시된 해답을 검토할 수는 있다. 가장 오래된 해답은 플라톤이 제시한 것이다. 이어, 플로티누스가, 그 다음으로는 성 어거스틴이 해답을 제시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인간이 발명한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나는 지금 인간의 발명품을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분들이 종교인이라면 아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영원이라는 아름다운 발명품이라고 말이다.

 

     영원이란 무엇인가? 영원이란 우리의 모든 과거의 총합이다. 영원이란 우리의 모든 과거, 모든 의식적인 존재의 모든 과거이다. 모든 과거, 즉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그런 과거이다. 그리고 영원이란 모든 현재이다.

 

  모든 도시와 사람들 그리고 행성들 사이의 공간을 포함하는 지금 이 순간이다. 그리고 영원이란 미래이다. 아직은 태어나지 않은 미래, 하지만 항상 존재하는 미래이다.

     신학자들은 영원이란 이 다양한 시간들이 기적적으로 결합된 하나의 순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플로티누스의 말을 인용할 수도 있다. 이 사람은 시간의 문제를 깊이 생각한 사람이다. 그에 따르면, 세 가지 시간이 있는데, 이 세 가지 시간이란 현재이다.

 

  그 하나는 현재의 현재로 내가 말하고 있는 이 순간이다. 즉, 내가 말했던 순간이다. 그 순간은 이미 과거에 속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과거의 현재로 우리가 기억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미래의 현재인데, 이는 우리들이 희망이나 두려움을 갖고 바라보는 시간일 것이다.

     이제 플라톤의 해답부터 살펴보자. 플라톤의 해결은 자의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이제 설명하겠지만, 그런 것은 아니다. 플라톤은 시간이란 영원의 가변적인 이미지라고 말했다. 그는 영원부터, 영원한 존재부터 시작한다. 영원한 존재는 다른 존재들에게 자신을 투사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자신의 영원 속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계기적으로 투사를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은 영원의 가변적인 이미지이다. 영국의 위대한 신비주의자 윌리암 브레이크는 이렇게 말했다. “시간은 영원의 선물이다.” 만약 우리들에게 전존재가 주어진다면~~   그 존재는 우주보다 더 크고, 세계보다 더 크다. 그런 존재가 우리에게 단 한 번만이라도 모습을 드러낸다면 우리는 전멸되고 무화되고 죽어버릴 것이다.

 

 

 


     반면에, 시간은 영원의 선물이다. 이러한 영원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연속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낮과 밤이 있고, 시간이 있고, 분(分)이 있고, 기억이 있고, 현실적인 감각이 있다. 그리고 미래, 아직은 어떤 형태인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예측할 수 있고, 또 두려워하는 미래가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들에게 연속적으로 주어진다. 우리는 우주의 전 존재를 짊어질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이를 벗어버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영원의 선물일 것이다. 영원 때문에 우리는 연속적으로 살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우리들의 삶이 낮과 밤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잠에 의해 우리의 삶이 중단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다행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 일과를 보내고 난 다음에 잠을 잔다. 잠이 없다면 삶을 견디지 못할 것이며, 기쁨을 누리지도 못할 것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모든 것이 주어지지만, 그것은 점진적으로 주어진다.

 

 

...

     윤회란 사라진 관념이다. 범신론자들이 믿고 있듯이 우리는 동시에 모든 광물이고, 행성이고, 동물이고, 인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는 이런 사실을 모른다. 다행히도 우리는 자신을 개별적인 존재라고 믿고 있다. 만일 우리가 압도당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전존재의 충만성 때문에 전멸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성 어거스틴을 살펴보자. 이 사람만큼 시간의 문제를, 시간에 대한 의문을 강렬하게 느낀 사람도 없다. 성 어거스틴은 시간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자신의 영혼은 불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하느님에게 시간이 무엇인지 계시해 주십사하고 빌었다.

 

  막연한 호기심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는 이 문제를 모르고서는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훗날 베르그손이 말했듯이, 이 문제는 본질적인 문제, 형이상학의 본질적인 문제가 되었다. 성 어거스틴이 그토록 열렬하게 얘기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지금 우리는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아주 간단한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그것은 제논의 역설이다. 제논의 역설은 공간에 관한 것이나, 여기서는 이를 시간에 적용하기로 한다. 운동에 대한 금언 혹은 아포리아 가운데서 가장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탁자의 어느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운동체는 다음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그 물체는 중간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보다 앞서 중간의 중간에 도달해야 하고, 그보다 앞서 중간의 중간의 중간에 다달아야 한다. 이런 식으로 무한히 계속된다. 운동하는 물체는 책상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에 도달할 수 없다.

     이것 말고도 기하학의 예를 들 수도 있다. 한 점을 생각해보자. 이 점은 아무런 연장(延長)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무한한 수의 점들이 연속적으로 모이면 직선이 된다. 그리고 무한한 수의 직선이 모여 면이 되고, 이 면들이 무한히 모이면 입방체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실을 어느 정도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점이 공간적인 것이 아니라면 연장이 없는 점들의 총합이 ―비록 그 수가 무한하다 할지라도― 어떻게 해서 연장을 가진 선분이 될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선분을 이야기할 때 나는 지구에서 달에까지 이르는 직선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지금 만지고 있는 탁자와 같은 이런 선분을 생각하고 있다. 이 선분 또한 무한한 수의 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무튼, 이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생각해왔다.

     버틀란트 럿셀은 이렇게 설명한다. 정수 다시 말해서, 1, 2, 3, 4, 5, 6, 7, 8, 9, 10 이렇게 무한히 계속되는 자연 급수가 있다. 그러나 다른 급수도 생각할 수 있다.

 

  그 급수는 정확히 첫째 급수의 절반의 크기다. 이는 1에 2가 대응하고, 2에 4가 대응하고, 3에 6이 대응하고......하는 식으로 짝수들로 구성된다. 또 다른 급수를 들 수도 있다. 아무 숫자나 선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365를 택했다면, 1은 365에 대응하고 2는 365의 제곱에 대응하고, 3은 365의 세제곱에 대응한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다양한 급수를 만들 수가 있는데, 이들 급수는 모두가 무한하다. 바꿔 말해서, 초한수(números trnasfinitos)에서 부분집합들은 숫자적으로 볼 때 전체 집합보다 작은 것이 아니다. 내가 알기로 수학자들은 이런 사고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우리들의 상상력으로는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이제 현재라는 순간을 살펴보자. 현재라는 순간은 무엇인가? 현재라는 순간은 약간의 과거와 약간의 미래로 이루어진 순간이다. 현재 그 자체는 앞서 말한 기하학의 점과도 같다. 현재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는 우리 의식의 직접적인 소여가 아니다. 아무튼, 우리는 현재가 있으며, 이 현재는 점차적으로 과거가 되고, 미래가 된다고 알고 있다.

 

     시간에 대한 두 가지 이론이 있다. 그 중 하나는 거의 모든 사람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으로, 시간을 하나의 강물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 강물은 시원으로부터, 알 수 없는 시원으로부터 흘러나와 우리들에게 도착한다. 다른 이론은 영국 사람, 브래들리의 형이상학적인 이론이다. 브래들리는 이와는 정반대라고 얘기한다. 즉, 시간은 미래에서 현재로 흘러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래가 과거로 변하는 순간이 바로 우리가 현재라고 부르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이론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시간의 원천을 과거에 둘 수도 있고 미래에 둘 수도 있다. 하지만 둘 다 마찬가지다. 우리는 항상 시간의 강물 앞에 있다. 이제, 시간의 근원에 관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플라톤은 다음과 같은 해결을 제시했다.

 

  시간은 영원에서부터 유래한다. 따라서 영원이 시간보다 앞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앞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영원이 시간에 속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시간은 운동으로 측정된다고 말하는 것도 오류이다. 운동이 시간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운동은 시간을 설명할 수가 없다. 성 어거스틴이 쓴 아주 아름다운 문장이 있다.

하느님은 시간 속에서가 아니라 시간과 더불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Non in tempore, sed cum tempore Deus creavit caela et terram).

 

 


 

    창세기의 첫 구절은 세상의 창조, 즉 바다와 땅과 어둠과 빛의 창조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시간을 창조했다고 말한다. 천지창조보다 앞선 시간이란 없다. 세상은 시간과 더불어 시작되었으며, 그 이래로 모든 것이 계속되고 있다.

     조금 전에 설명한 초한수라는 개념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지 어떨지 모르겠다. 내 상상력으로 그러한 개념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런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우리는 자연 급수의 경우 짝수의 숫자는 홀수의 숫자와 같다는 사실, 즉 무한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리고 365를 제곱한 급수의 수도 전체 수와 같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렇다면 시간의 두 순간이라는 사고를 받아들이는 게 어떨까? 7시 4분과 7시 5분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는 게 어떨까? 이러한 두 순간 사이에 무한수의, 혹은 초한수의 순간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란 매우 어렵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틀란트 럿셀은 우리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를 바란다.

     베른하임(Bernheim)은 제논의 역설이 공간화된 시간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생명의 충동이며, 우리는 그것을 세분할 수 없다고 했다. 예를 들어, 아킬레스가 1미터를 달리는 동안 거북이는 1센티를 갔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먼저 아킬레스가 큰 걸음으로 달린다고 말한 다음에, 거북이가 달렸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공간에 적합한 측정 방법을 시간에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윌리암 제임스처럼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5분의 시간이 흐른다고 생각해보자. 5분의 시간이 흐르기 위해서는 5분의 절반이 흘러야만 한다. 2분 30초가 흐르기 위해서는 이의 절반이 흘러야만 한다. 2분 30초의 절반이 흐르기 위해서는 또 이 시간의 절반이 흘러야만 한다. 이런 식으로 무한히 계속 되면 5분은 절대로 흘러갈 수가 없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제논의 아포리아는 시간에 적용해도 마찬가지의 결과를 낳는다. 화살의 예를 들어보도록 하자. 제논은 날아가는 화살은 매 순간마다 멈추어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운동이란 불가능하다. 부동(不動)의 총합이 운동을 구성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공간이 있다고 가정할 때 그 공간은 ―무한히 나누어질 수는 없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점들로 나누어질 수 있다. 우리가 현실적인 공간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면 시간 역시 순간들로, 순간의 순간들로, 각각의 단위들의 단위들로 세분될 수 있다.


     만약 세계가 우리들의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면, 또한 우리들 각자가 세계를 꿈꾸고 있다면, 우리들은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옮겨가며, 우리가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세분(細分)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떨까?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느끼는 것이다.

 

  우리들의 지각만이, 우리들의 감정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앞서 말한 세분은 상상적인 것이지 실제적인 것이 아니다. 다른 사고도 있다. 이러한 사고 또한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등질적인 시간이라는 개념이다. 이는 뉴튼이 확립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뉴튼 이전 시대에 확립된 함의였다. 뉴튼이 수학적인 시간에 대하여 말할 때 ―다시 말해서 전우주를 통해서 단 하나의 시간만이 흐른다고 할 때― 그 시간은 지금 빈 공간을 흐르고 있는 시간이며, 별들 사이를 흐르고 있는 시간이며, 균질적으로 흐르고 있는 시간이다. 그러나 영국의 형이상학자 브래들리는 이렇게 생각할 아무런 근거도 없다고 말했다.

     다양한 계열의 시간, 즉 그들 사이에 아무런 관련도 없는 여러 계열의 시간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예를 들어, a, b, c, d, e, f......라고 불리우는 한 계열을 생각해보자. 이것들은 그들 사이에 관련을 맺고 있다. 즉, 어떤 시간은 다른 시간보다 선행하거나 후행하고, 이 시간과 저 시간은 동시적이다. 하지만 다른 계열, 즉 α, β, γ......로 이루어진 시간을 상상할 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는 여러 가지 시간 계열을 가정할 수 있다.

     왜 단 하나의 시간 계열만을 가정하는가? 여러분들이 다음과 같은 생각을 받아들일지 어떨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많은 시간들이 있으며, 그와 같은 시간 계열들은 ―물론 그 계열을 구성하는 원소들은 선행하거나 후행하거나 동시적이다― 선행하지도, 후행하지도, 동시적이지도 않다.

 

  이는 상이한 계열들이다. 우리들 각자의 의식에 대해서도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라이프니쯔를 생각해 보자.

     우리들 각자는 일련의 사건들을 체험하며, 이 일련의 사건들은 다른 일련의 사건들과 평행할 수도 있고 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왜 이런 사고를 받아들이는 것일까?

 

  이러한 사고를 통해 우리는 보다 광대한 세계, 현재의 세계보다 훨씬 더 경이로운 세계에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하나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시간은 하나라는 사고는 ―내가 이해하지도, 알지도 못하는― 현대 물리학이 폐기해버렸다.

 

  시간은 다양하다. 무엇 때문에 뉴튼이 가정했던 것처럼 시간은 단 하나의 시간, 절대 시간뿐이라고 생각해야 하는가?

     이제 다시 영원이라는 주제로, 영원적인 것에 대한 사고로 돌아가자. 영원적인 것은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를 드러내고자 하며, 시간과 공간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영원적인 것은 원형의 세계이다. 예컨대, 영원적인 것 속에는 삼각형들이란 없다. 단 하나의 삼각형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삼각형은 등변 삼각형도 이등변 삼각형도 부등변 삼각형도 아니다. 이 삼각형은 이들 세 삼각형인 동시에, 어느 삼각형도 아니다. 그러한 삼각형을 지각할 수 없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그런 삼각형이 존재한다.

     또 하나 예를 들자면, 우리들 각자는 인간의 원형을 복사한 존재로, 시간적이며 죽어야 하는 존재이다. 여기서 문제점은 인간이 각기 플라톤적 원형을 갖고 있느냐는 것이다. 아무튼, 절대적인 것은 스스로를 드러내려고 하며,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시간은 영원의 이미지이다.

     마지막 얘기는 시간이 왜 연속적인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은 연속적이다. 왜냐하면, 시간은 영원적인 것에서 빠져나오는 동시에 영원적인 것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미래라는 생각은 처음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우리들의 열망과 상응한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했다. 모든 인간들, 즉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무시간적 ―시간보다 선행하지도 후행하지도 않는― 이며, 시간 밖에 있는 영원한 원천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이러한 열망은 생명의 충동 속에 남아 있다. 또한,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현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도에는 과일이 떨어지는 그러한 순간은 없다고 말하는 형이상학자들이 있다. 과일은 떨어지려고 하거나 땅에 떨어져 있을 뿐, 떨어지는 순간이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세 가지로 나누었던 시간 ―과거, 현재, 미래― 중에서 가장 난해하고,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이 현재라는 사실은 얼마나 이상한가! 현재는 점(点)과 마찬가지로 붙잡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연장이 없는 점이란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명백한 현재란 약간의 과거와 약간의 미래일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시간의 경과를 느낀다. 내가 시간의 경과에 대해서 말할 때, 여러분 모두가 느끼고 있는 것을 얘기하고 있다. 내가 현재에 대해서 얘기할 때는 추상적인 실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란 우리들 의식의 직접적인 소여가 아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시간 속으로 미끌어져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자신들이 과거로부터 미래로, 혹은 미래로부터 과거로 지나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괴테가 소원했듯이, “멈추어라. 너는 참 아름답구나~~~”라고 시간에게 말할 수 있는 순간은 없다.

 

  현재는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순수한 현재를 상상할 수 없다. 순수한 현재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는 항상 과거의 일부분과 미래의 일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시간에 있어서 이는 필연적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경험에서 시간은 언제나 헤라클레이토스의 강물과도 같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그 고대의 비유를 뒤따르고 있다. 마치 수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무런 진보도 이룩하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언제나 우리는, 강물에 자신을 비추어보면서 물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그 강물은 그 강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방금 보았던 강물과 이 강물 사이에서 자신은 다른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은 헤라클레이토스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저 헤라클레이토스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조금은 변하고 조금은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이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신비한 그 무엇이다. 기억이 없다면, 우리들 각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기억이란 그 상당 부분이 떠들썩한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이것이 본질적인 것이다.

     예컨대, 현재의 내가 되기 위해서 내가 팔레르모에서, 아드로게에서, 제네바에서, 스페인에서 살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는 없다. 동시에 그런 장소에 있었던 나는 현재의 나가 아니라는 것을 느껴야만 한다. 현재의 나는 타자(他者)이다. 이것이 우리가 결코 풀 수 없는 문제, 즉 변화하는 자기동일성의 문제이다.

 

  아마 변화라는 말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것의 변화에 대하여 말할 때 그 말은 그 어떤 것이 다른 것으로 대체되었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식물이 자란다고 말한다. 이 말은 어린 식물이 보다 더 큰 식물로 대체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식물이 다른 것으로 변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덧없는 것 가운데 영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래라는 생각은 고대 플라톤의 생각이, 즉 시간이란 영원적인 것의 가변적인 이미지라는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한다. 시간이 영원적인 것의 이미지라면 미래는 미래를 향한 영혼의 운동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미래는 다시 영원적인 것으로 돌아갈 것이다.

 

  즉,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고뇌로 이루어져 있다. 성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매일 죽는다.” 이 말은 서글픈 말이 아니다. 사실, 우리는 매일 죽고, 매일 태어난다.

 

  우리는 끊임없이 죽어가고 있으며, 태어나고 있다. 따라서 시간의 문제는 여타의 형이상학적 문제보다 더 우리에게 와닿는다. 다른 문제들은 추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문제는 우리의 문제이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들 각자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어쩌면 우리는 언젠가 그것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 어거스틴의 말처럼 그러는 동안에도 내 영혼은 그것을 알고 싶어서 불타오른다.    -◇

 

1978년 6월 23일

 

 

 

 

 

 

 

 

바벨의 도서관

 

 

   우주(어떤 사람들은 도서관이라고 하기도 한다)는 수많은, 어쩌면 무한한 육모방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방들 가운데에는 낮은 난간이 둘러져 있는,  커다란 환기통이 있다.   

 

  거기를 통하여 어느 방에서도 아래 위의 방들이 훤히 보인다. 방들의 내부는 일정하게 되어 있다.

 

 

 

 

  스무 개의 책장이 두 벽을 제외한 나머지 네 벽을 채우고 있는?--한 쪽 벽마다 다섯 개의 긴 책장이 놓여 있다---벽의 높이는 보통 사람의 키보다 조금 높다.  책장이 놓여 있지 않는 하나의 벽에는 다른 방으로 통하는 좁은 통로가 있으며, 그 통로 좌우에는 조그만 구석방이 각각 있다.

 

  하나는 잠자는 곳이고, 다른 하나는 용변을 보는 곳이다. 그리고 아득한 심연으로부터 저 위쪽까지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이 여기로 통과한다.

 

  또 그 통로에는 거울이 걸려 있는데, 거울 때문에 모든 것들이 두 개씩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이 거울을 보면서 도서관이 무한한 것이 아니라고 추측한다. ( 만약 진짜로 무한하다면 거울이 어떻게 그것을 두 배로 만들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반짝이는 거울의 표면이 무한함을 비추고 또 보장하는 것이라고 상상하고 싶다.

 


  빛은, 램프라는 이름을 가진 몇 개의 둥근 과일들로부터 나온다. 각 방마다 두 개의 램프가 마주 보고 걸려 있으며, 이것들은 충분히 밝지는 않지만 언제나 켜져 있다.

 

  도서관에 사는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도 젊었을 때 여행을 하였다. 나는 한권의 책, 아마도 書誌日錄들에 대한 목록을 찾아 돌아다녔다. 이제 내 눈은 내가 쓴 것도 못 알볼 만큼 나빠졌으며, 나는 내가 태어났던 육모방으로부터 좀 떨어진 곳에서 죽을 채비를 하고 있다.

 

  내가 죽으면 사람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나의 시신을 난간 아래로 던질 것이고, 아득한 허공이 나의 무덤이 될 것이다. 나의 시신은 끝없이 추락할 것이고, 추락하면서 부패하고 마침내 산화할 것이다.

 

 

 

 

 

  나는 도서관의 끝없음을 믿는다. 관념론자들에 의하면, 육모방은 절대 우주 혹은 적어도 우주에 대한 우리들의 직관에 있어서 필수적인 형식이다.  그들은 세모방이나 다섯모방을 인정하지 않는다.

 

( 신비주의자들은 한 권의 거대한 책이 있는 둥근 방을 신비체험 속에서 보았다고 주장한다. 거대한 책의 책등이 그 방의 모든 벽을 둥글게 에워싸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신뢰할 수 없고, 이들? 말은 애매모호하다. 그 둥글고 거대한 책은 바로 神이다 ).

 

  현재로서는 다음과 같은 옛 말씀을 되새기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 도서관은 하나의 天體이다. 모든 육모방이 그 정확한 중심이 되며, 그 둘레는 무한하다 >.


  모든 육모방의 벽 하나하나마다 다섯 개의 책장이 붙어 있다. 각 책장에는 동일한 모양의 책 서른 두 권이 꽂혀 있으며, 이 책들은 모두 310페이지로 되어 있다.  그리고 한 페이지는 40행이며, 한 행은 80개의 검은 글자로 되어 있다.   책등에도 글자가 찍혀 있는데, 이 글자들은 책의 내용을 암시하거나 말해 주는 것이 아니다.

 

  책등의 글자가 책 내용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는 것은, 처음에는 이상하게 여겨질 것이다. 이 궁금증을 간략히 풀어주기 이전에 (그 비극적 암시에도 불구하고, 이 궁금증의 해명은 아마 이야기의 핵심일 것이다), 나는 몇 가지 공리를 언급해 두고자 한다.

 


제 1 공리 : 도서관은 <영원으로부터 ab aeterno> 존재한다.

 

  분별 있는 자라면 누구도 이 진리를 부정하지 못할 것이며, 아울러 이 세상에 종말이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서(司書)라 할 수 있는 인간은, 우연의 산물이거나 나쁜 조물주들의 작품이다. 이에 반하여 우아한 책장과 신비한 책 그리고 순례자들을 위한 편안한 계단들, 사서들을 위한 호젓한 장소 등을 갖추고 있는 우주 만이 신의 작품이다.

 

  어떤 책 끝장에 서툰 필체로 휘갈겨 쓴 삐뚤어진 글씨와 책 속에 들어 있는 정확 섬세하고 균형 잡히고 짙은 글씨들을 비교해 보면, 신과 인간의 차이가 얼마나 큰가 쉽게알 수 있다.

 


제 2 공리 : 정서법 기호의 수는 모두 25이다. 3백년 전, 이 공리에 의해 도서관에 관한 일반이론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추측조차 어려웠던 문제, 즉 거의 모든 책의 무정형적(無定型的) 본질이라는 문제를 만족스럽게 해결하였다.

 

  구역번호 25-94의 육모방에서 아버지가 보았던 책 가운데 어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MCV라는 글자만 되풀이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구역에서 자주 열람되는 어떤 책은 글자로 만들어진 일종의 逆官이다.

 

    그러나 그 책의 끝에서 두 번째 페이지에는 <오, 시간, 너의 피라미드들이여 O Time your pyramids>라는 구절이 나온다. 널리 알려진 바대로, 한 줄의 그럴듯한 내용이나 요점 담긴 한마디가 있기 위해서는 어울리지도 않고 조리도 맞지 않는 한 무더기의 헛소리들이 있게 마련이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미개 지역의 사서들은 책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헛된 미신적 관습을 거부한다. 그들은 책 속에서 djEJs 의미를 찾는 일이 꿈이나 손금을 해석하는 일처럼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여긴다. 

 

  그들은 글쓴이가 25개의 기본기호들을 모방하였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글쓰기란 우연적인 것이며 책들은 그 자체로서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제 곧 밝혀지겠지만, 이러한 견해가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요령부득의 책들은 옛날 글이나 먼 나라 말로 된 것이라고 오랫동안 여겨졌다. 아주 옛날 사람들, 즉 최초의 사서들은 오늘날 우리들과는 다른 언어를 사용했음이 사실이다. 또한 오른편으로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는 사투리를 사용하며, 90층 위쪽에서는 알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함도 사실이다.

 

  거듭 말하건대, 그것은 참말이다. 그러나 410페이지 煥恝?MCV만 되풀이되어 있는 것은 어떤 사투리나 원시언어에도 없다. 몇몇 사서들의 추정에 의하면, 각 글자는 다음 글자에 영향을 끼쳐서 가령 71페이지의셋째 줄에 나오는 MCV는 다른 페이지의 다른 줄에 나오는 MCV와 그 뜻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막연한 추정만으로는 해석이 되지 않았다. 또 다른 사서들은 그것이 암호문과 같은 것이라고 했는데, 이러한 추측은 비록 글쓴이가 의도적으로 암호문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많은 사람의 동의를 얻었다.

 

  5백년 전, 위층의 司書長이 어떤 책을 한 권 발견했다. 그 책은 여느 책들과 마찬가지로 혼란스러웠지만, 특이한 것은 꼭 같은 行이 거의 두 페이지나 계속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는 그 책을 떠돌이 암호 해독가에게 보여주었는데, 그 해독가는 그것이 포르투갈어라고 했다. 또 다른 사람은 그것이 이디시라고 하기도 했다. 백년이 좀 못 걸려서 그 언어의 비밀이 마침내 밝혀졌다. 그것은 고대 아랍어의 영향이 섞인, 과라니어의 사모예드-리투아니아 방언이었다. 그 내용도 해독되었다. 그것은 무한히 반복되는 변화들의 예들로써 설명된 조합 분석이었다.

 

 이러한 예들 덕분에 어떤 천재 사서가 도서관의 근본 법칙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천재 사서는 책이 아무리 다양하다 하더라도 모든 책은 일정한 요소(쉼표, 마침표, 띄어쓰기 공간, 22자의 철자)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는 <거대한 도서관 안에 서로 같은 책은 한 권도 없다>고 말했는데, 이는 어떤 순례자들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뒤집을 수 없는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해서, 그는 결론을 유추해 내었다.

 

  즉 도서관은 전체이며 그 책장들에는 스물 몇 개의 정서법 기호들로써 조합 가능한 모든 것들(그 숫자가 아무리 광대하다 할지라도 무한하지는 않다), 다시 말해 모든 언어로 된 모든 표현들이 다 있다는 것이다.

 

 


 

 

  도서관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 미래세계의 상세한 역사, 천사들의 자서전들, 도서관의 믿을 만한 서지 목록, 수백만 개의 가짜 서지 목록들, 그 가짜 서지 목록들의 허구성을 증명한 책, 진짜 서지 목록의 허구성을 증명한 책, 바실리데스의 그노시스적 복음, 이 복음의 주해서, 그 주해서의 주해서, 당신의 죽음에 대한 진정한 해명서, 각각의 책에 대한 모든 언어의 번역본들, 모든 책들의 증보판들.


  도서관이 모든 책을 다 소장하고 있다는 주장이 나왔을 때, 그 첫 느낌은 벅찬 즐거움이었다. 누구나 숨겨진 보물의 주인이 된 것처럼 흥분했다.

 

  도서관에는 모든 개인적, 우주적 문제들에 대한 속시원한 해답이 있었다. 우주는 정당한 것이었으며, 우주는 갑자기 무한정한 희망의 공간이 되었다. 그 무렵에는 筬書. 즉 동서고금의 모든 인간의 운명이 기술되어 있으며 미래 세계의 엄청난 비밀을 담고 있는 해명과 운명의 책들에 대한 논의가 많았다. 수천 명의 탐욕스런 사람들은 그들이 태어났던 육모방을 뛰쳐나와 자신들의 잠서를 찾고자 헛되이 계단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좁은 복도에서 다투고 음산한 저주를 퍼부었으며, 신성한 계단에서 서로를 교살하고 기만적인 책을을 터널 바닥으로 던졌으며, 먼 지방 사람들에게 떠밀려서 떨어져 죽기도 했다. 미친 사람들도 있었다.


  잠서는 분명히 존재한다. 나는 두 권의 잠서를 직접 본 적이 있다. 그 책은 미래에 정말 존재하게 될 사람들의 운명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잠서를 찾는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이 기록된 책이나 그 비슷한 것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였다.


인간 존재의 근본적 미스터리, 즉 도서관과 시간의 근원에 대한 신비 역시 밝혀질 것으로 기대되었다. 사람들은 이 엄청난 미스터리도 말로 설명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만약 철학자들의 언어가 이 설명에 미흡하다면, 도서관이 그에 필요한 언어와 어휘와 문법을 제공할 것으로 믿었다.


  인간들의 도서관의 육모방을 지긋지긋하게 생각한 지도 이제 4세기가 지났다---.


  공식적으로 책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求道者 inquisitor>라고 불린다. 나는 그들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늘 지쳐 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빠져죽을 뻔했던, 발판이 빠진 계단에 대해 이야기했고, 사서가 있는 방과 계단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따로는 손닿는 곳에 있는 책을 뽑아 들쳐보면서 희귀한 단어들을 찾기도 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무엇을 찾을 수 있다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기대가 남달리 크면 실망도 크게 마련이다. 어느 육모방의 어느 책장에 소중한 책들이 있음이 확실하지만 그것을 손에 놓을 수 없음 또한 확실하다는 사실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어느 불경스런 敎派는 책찾기를 중단하고, 뜻밖의 행운에 힘입어 그 경전들을 쓸 수 있을 때까지 문자와 기호들을 이리저리 맞추어 보자고 제안하였다. 당국은 엄중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교파는 사라졌다. 그러나 내가 어렸을 때, 노인들이 움막 같은 곳에 오랫동안 숨어 살면서 금지된 주사위상자 속에 동전을 담아서 신성한 무질서를 엉성하게 흉내내고 있었던 것을 보았다.


  이와는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쓸모없는 책들을 없애버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출입증을 제시하고 (이 출입증은 때때로 진짜였다) 육모방에 들어와서는 무성의하게 책을 훑어보고, 그러고는 책장을 온통 부숴버렸다.


그들의 쓸모없는 것들에 대한 지나친 혐오와 분노 때문에 수백만 권의 책?함부로 망실되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들의 이름을 저주한다. 그러나 미친 짓으로 망실된 그 <보물들>을 애석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 하나는, 도서관이 무한하기 때문에 인간에 의한 망실은 거의 표나지 않을 정도로 작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모든 책은 유일하고 대체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도서관 전체로 보면 그것과 거의 유사한---어떤 경우는 단 한 글자나 단 하나의 마침표만 다르다---복사본 들이 수십만 권 있다는 사실이다.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나는 그 결벽주의자들에 의한 책의 훼손이 그렇게 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광란에 겁먹은 자들이 과장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들은 <심홍색 육모방>에 소장되어 있는, 보통 책 보다 좀 작고 전능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삽화가 그려진 마법의 책들에 매료되어 더욱 설쳐댔다.

 

  이러한 것들 이외에도 당시에는 또 다른 미신이 있었다. <책의 인간>에 대한 미신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어느 책장에 가면 다른 모든 책의 주해서요 또한 완벽한 개요서인 한 권의 책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 책을 읽어본 어떤 사서는 그 책에서 어떤 신을 유추해 내었다. 이 구역의 언어에는 먼 곳의 관리가 그 책을 숭배했던 흔적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순례자들이 그 <책의 인간>을 찾아 헤매었다.

 

  그들은 백년 동안 수많은 곳을 순례했지만 그 책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 책이 소장되어 있는 비밀 서고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 어떤 사람은 거꾸로 찾아가는 방법을 제안하였다. 즉 A라는 책을 찾기 위해서는 그 책의 위치가 적혀 있는 B라는 책을 찾아보아야 하고, B라는 책을 찾기 위해서는 그 책의 위치가 적혀 있는 C라는 책을 먼저 찾아보아야 하고---이런 식으로 찾아보자는 것이다.


  이 방법을 실행해 보느라고 나도 몇 년을 허송 세월했다.k 내가 보기에는 우주의 어느 책장에 완전한 책 a total book 이 존재할 것 같다. 나는, 그것이 오직 한 사람 뿐이었더라도 또 수 천년 전의 일이었더라도, 그 책을 읽고 검토해 본 사람이 있었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가 아니라면 다른 누구인가라도 그 영광과 지혜와 행복을 갖기를 기원한다.

 

  내가 있을 곳이 설사 지옥이라 하더라도 천국은 존재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실패하고 멸시받아도 좋지만, 그러나 어느 순간, 어떤 존재에게 그대의 거대한 도서관은 정당화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불순한 사람은 터무니없는 것들이 도서관에서는 정상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합리적이거나 조리가 조금이라도 있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라는 것이다. 내가 알기로, 그들은 <도서관이 열병에 걸려 있다>고 말한다. <그 도서관의 위험스런 책들은 언제나 다른 책들로 바뀔 운명에 직면해 있으며, 또한 그곳에서는 마치 어떤 열광적 신성이 그러는 것처럼 모든 것이 긍정되고 부정되고 또 뒤죽박죽>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무질서를 매도할 뿐만 아니라 예증도 한다. 그리고 말하는 자의 무감각과 무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실제로 도서관에서 25개의 정서법 기호를 만들어낼 수 있는 언어구조가 다 있다. 그러나 전적으로 터무니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내가 관할하던 여러 육모방에서 가장 좋은 책은 ‘머리 빗은 천둥 Combed Clap of Thunder' 이라거나, ’석고의 경련 The Plaster Cramp' 이라거나, ‘악삭삭삭스믈뢰 Axaxaxax Mlo' 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 쓸모없는 일이다. 그 제목들은 엉뚱해 보이긴 하지만 암호문자나 비유로서의 적절함을 분명히 지니고 있다.

 

  이것들은 언어로 된 것이기 때문에 그 적절함은 도서관의 책 속에 이미 가설로서 ex hypothei 수록되어 있다. 나는, 신성한 도서관이 아직 예상하지 않았던 말, 가령 dhcmrlchtdj와 같은 말을 만들 수가 없다. 그 말은 비밀언어들이 지닌 무서운 의미를 나타내지 못한다. 부드러움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은 음절을 발음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이 발음하는 음절은 부드러움과 공포로 가득 찬, 신의 전능하신 이름이기도 한다.

 

  말한다는 것은 곧 동어반복에 빠지는 것이다. 어떤 육모방의 책장에 있는 전 30권으로 된 책 속에는 이러한 논의들이 이미 적혀 있고, 또 그에 대한 평가까지 적혀 있다.

(n 개의 있을 수 있는 언어들은 꼭같은 어휘를 사용한다; 그들 중 어떤 언어에서는 <도서관>이라는 기호가 <육모방들의 편재적이고 항구적인 체계>라고 정확히 정의된다. 그러나 <도서관>은 <빵>이나 <피라미드> 또는 어떤 것이며, 그것을 정의한 4개의 단어들은 다른 뜻을 갖는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내가 사용하는 언어를 이해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가?)


  꼼꼼한 글쓰기는 나로 하여금 인간의 현재 조건을 잊게 만든다. 그러나 모든 것이 이미 씌어졌다는 확신은 우리 모들을 無化시키고 허깨비로 만들어버린다. 내가 아는 어떤 지역의 젊은 이들은, 단 한 자도 이해할 줄 모르면서도 책 앞에 무릎을 꿇고 무턱대고 책장에 키스를 한다.

 

  전염병, 교리적 갈등, 종내는 강도로 전락하고 마는 순례 등등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나는 매년 그 수가 증가하는 자살에 대해서도 언급했던 것 같다. 아마 나의 늙음과 두려움 때문이겠지만, 나는 도서관의 영원함과는 반대로 인간이 소멸의 길을 걷고 있다고 짐작한다.

 

  도서관은 계몽적이고, 고독하고, 무한하고, 움직임이 없으며, 귀중한 책으로 가득 차 있고, 쓸모없고, 불후하고, 비밀스럽다.


  나는 방금 <무한하다>고 말했다. 내가 이 말을 쓴 것은 단순한 수사적 습관이 아니다.

 

  내 말은, 이 세상이 무한하다고 말하는 것은 비논리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계가 유한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아득히 먼곳에서 보면 복도와 계단과 육모방들의 끝이 보일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말도 안 된다.

 

  그리고 세계가 무한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가능한 책의 숫자가 한정되어 있음을 망각하고 있다. 이러한 오래된 문제에 대하여, 나는 감히 다음과 같은 해결을 제시하는 바이다.

 

  도서관은 무한하며, 주기적이다. 만약 영원한 여행자가 있어 세계를 어느 방향으로든 가로질러 돌아다닌다면, 수세기 후 그는 똑같은 무질서 속에서 똑같은 책이 반복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반복이 일종의 질서이며, 또 <질서> 그 자체이다.).

 

  내 고독은 이와 같은 멋진 희망을 즐긴다.  -◇

 

 

출처: https://cybele.tistory.com/110 [Sundays and cybele]